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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곽희문 강동희 선교사 소식
2016-04-19
yskim
2016년 4월 19일 화요일
281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왕상 15:28-29)
 
  
 
“형. 어느 나라가 좋은 나라야?”
 
  
 
저희 집에서만 하던 말이었는지 모르겠는데요. 어렸을 때 축구 경기를 보면서 형한테 자주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 경기를 할 때는 머리 속에 입력되어진 대로 한국을 응원하면 되지만,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기에서는 어느 팀을 응원해야하는지 난감해할 만한 나이였나 봅니다. 
그러면 형은 “응. 저기 하얀 옷 입은 선수들 보이지. 저 나라가 좋은 나라니까 그 팀을 응원하면 돼” 이렇게 대답을 했었지요. 
형이 응원하라고 말한 좋은 나라의 기준은 형이 응원하는 나라, 한국과 친하다고 형이 생각하는 나라, 그리고 축구를 잘한다고 형이 생각하는 나라였을 겁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본을 응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브라질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응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때에 유치한 추억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것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축구를 볼 때 마다 일본은 나쁜 나라고 브라질은 좋은 나라로 제 손발이 반응하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저 같은 주제가 함부로 일반화 시켜서 말씀을 드릴 수 는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너희들이 아무리 뭐라고 그래도 인간은 다 똑같다." 라고 선포하시는 십자가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정의(定義)는 이와 같이 참 정의(正義)롭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을 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며 전쟁을 한 나라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수많은 나라와 싸웠고 그들을 정복했고요. 
그렇게 마주한 수많은 승리 앞에서 그들은 이렇게 외쳤을 겁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러나 상대편 나라 입장에서 보면 나쁜 놈도 이렇게 나쁜 놈들이 없었을 겁니다.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더기를 와서는 지나갈 길을 내주라고 하는데 누가 "가리부(환영합니다)" 이러겠습니까. 
그래서 싫다고 했더니 싹 쓸어버리지를 않나, 멀쩡히 터를 잡고 잘 살고 있던 가나안의 거주민들에게 어디선가 이스라엘이라는 메뚜기떼 같은 것들이 와서 싸움을 걸고 옵니다. 
그리고는 차차 남의 땅을 먹어 가다가 급기야 그 땅을 모두 차지해 버렸습니다. 
이 일을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불의와 억울함의 극치지, 절대로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분명 대대손손 나쁜 나라의 대명사로 이스라엘을 기억했을 겁니다. 이처럼 나의 나라나 내가 응원하는 나라가 반드시 옳다는 생각은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의이기를 소망하는 바램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의는 아닙니다. 정의라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옳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주제파악이 된 우리들에게 위 말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나의 의로 판명 되어서 주님께 죄송했던 적이 평생 동안 족히 천 번은 넘는 분들이 그리스도인일 테니까요. 
반면에 세상 사람들에게 위 말은 놀랄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듣기에는 매우 거북한 얘기일 겁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구도 응원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 
세상의 옳고 그름이 모두 상대적이어서 정의가 아니라면 아무 판단도 하지 말고 막 살아라, 이 말이야? 
우리가 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그러면 정의가 뭔지를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소리를 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의입니다." 라고 답을 하면 "이건 또 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럴 겁니다. 
제가 이런 다람쥐 챗바퀴 대화를 해봐서 아는데 이런 부분에 대해 세상과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캅사벳에 처음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일이었습니다. 
"포도주의 성경적 의미"를 알려드리기 위해 그분들이 답을 모를 거라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질문을 드렸습니다.
 
 
“포도 아시지요?" 
“.......” 
“ 포도 모르세요? 그 뭐냐. 
음..
과일 하나에 보라색이나 검은색 알갱이가 막 달라붙어 있는데..
그거 아시지요?” 
“.........” 
“진짜 맛있는데 과일인데, 음..
바나나 아시지요? 
바나나보다 더 맛있어요” 
“그럴리가. 
바나나 보다 달다고? 
그런 과일이 있다고?” 
“물론 신 맛이 나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단 것은 진짜 맛있어요” 
“그래도 바나나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날 서로가 고집을 부렸다면 3년이 지난 지금까지 포도 얘기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논쟁 꺼리에 대한 경계를 발견했습니다. 
포도와 바나나를 모두 아는 사람들끼리는 논쟁을 할 수 있지만, 둘 중 하나만 아는 사람들과는 그냥 평행선을 달리며 서로 우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게 "정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정의입니다"라고 백날을 떠들어도 그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설득하지 않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선포한 후 그들의 귀를 열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은혜를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달리 "내가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다"라는 말에 무조건 아멘을 합니다. 
"나나 나의 나라가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신 겁니다."라는 말에 당연하게 수긍을 합니다. 
그래서 자주 까먹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잘하지만, 잡아주면 금방 무릎을 꿇고 돌아오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정의다" 라는 대원칙에는 절대로 동의를 하게 된 자들이니까요.
 
그런데 오늘 나누고 싶은 말씀은 나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정의롭지 못하게 살고 있는 사람을 구별하고 찾아냄으로 "나는 정의롭게 살고 있다."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왕상 15:28-29)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것으로 유명한 자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 잘못한 왕을 묘사할 때 "그들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 여로보암이 죽고 아들 나답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양반도 아버지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상 15:26). 
그러던 차에 바아사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악한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게다가 악행의 원흉인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이 있는 자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정도면 우리는 바아사라는 이분에 대해 경외심을 갖을만 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 바아사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Baasha로 영어 이름을 바꿔볼까 하는 사람도 등장할 만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정의에 정반대쪽 삶으로 반역과 패역을 일삼았던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나답 그뿐 아니라 그들이 남겨놓은 악의 씨앗을 모조리 쓸어버렸으니 "정의의 사도"로 불리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왕상 15:34)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정의(正義)에 대한 오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의한 나답과 여로보암의 집안을 모두 죽였기에 바아사는 정의를 쫓았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버리는 오해말입니다. 
이런 오해는 하나님에게 불의를 저지른 자들을 보며 분노를 느낌으로, 나는 그들과 달리 하나님의 정의를 살아내고 있다고 믿어버리도록 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기업이 되어가고 있는 몇몇 대형 교회의 잘못을 보고 분노합니다. 
그 귀한 헌금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합니다. 
파송 받던 그날의 뜨거움을 잊는 선교사를 욕합니다. 
선교지에 선교를 왔는지 이민을 왔는지 모르겠다고 쓴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어디론가 한참이나 잘못 가고 있는 교회를 먼 산 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는 사역자들에게 불만이 많습니다. 
없는 얘기를 지어내면서 분란만 일으키고 있는 누구 권사와 장로 때문에 속이 상합니다. 
말도 안되는 성경풀이로 성도를 현혹시키는 이단을 경계하자며 비판합니다.  
 
이렇게 나열한 모든 사항은 욕을 먹어도 싸고 또 욕을 먹어야 합니다. 
고쳐져야 하고 개선되어야 합니다. 
막아야 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정말로 저래서는 절대 안되는 일들입니다. 
이런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분별이지 정죄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지 않는 모습들이니까요.
 
그런데, 바아사의 삶은 이런 비난과 비판과 정죄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화살을 던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정의를 따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가지 않아야 할 길을 알았다고 해서 가야 할 길에 내가 들어섰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았는데, 나도 가지 말아야 할 다른 길을 가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정의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정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의인 것을 구별한 것으로 정의를 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 문제에 보기가 다섯 개가 있습니다. 
답은 3번입니다. 
 
1번은 절대 답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1번을 정답군에서 보기 좋게 재꼈습니다. 
"네가 답이 아닌 건 알아!" 그렇다고 이 친구가 답을 고른 것은 아직 아니니 않습니까. 
1번이 아닌 것을 알았지 3번이 옳은 답이라는 것을 안 것은 아니니까요. 
이 친구는 3개의 잘못된 답으로 갈 확률이 여전히 높습니다. 
바아사는 나답의 삶이 답이 아닌 것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답이라는 1번은 오답인 것을 알고 재꼈는데, 본인은 5번에서 2번으로 그리고 다시 4번으로 적었다 지웠다 하면서 인생을 살았나 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3번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주의 뜻을 따르려는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깃발을 들고 "3번이 답이다" 라고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것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인지 알고 살았는데 살고 보니 나의 의였더라 하는 경우가 다반수고, 저 길은 불의의 길이니 이 길로 가야지 하고 힘써 갔건만 지나고 보니 오답을 피해서 다른 오답길로 갔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요. 
누구도 명쾌한 대답을 못할 겁니다. 
어려운 말로 뭐라고 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살라고요"라는 질문에는 "주님의 뜻대로"라고 대답할 수 밖에요. 
문제는 무엇이 주님의 뜻이냐는 질문인데 말입니다
 
 
작년에 잠시 한국에 다녀 온 마이클. 겪하게 반겨주는 엘토토 식구들 
 
청각장애인 딸과 귀한 시간을 갖은 엘고마를 안아 주시는 실리비아 어머니
 
탄자니아 장애인들을 섬기는 엘토토 식구
 
1년 동안 엘토토를 섬기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지은 자매와 눈물로 작별하는 엘토토 식구
 
 
잘모르겠으니 사랑하는 것이 답일겁니다. 
어느 순간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것이 오답은 절대 아니니까요. 
우리 같은 수준의 자들이 언제나 정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겠고, 오답으로 살지 않는 것만도 할렐루야가 아니겠습니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른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기다리면 그것이 최선으로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모르겠다면,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우선 기쁘게 하는 것은 또 어떨지 싶습니다. 
하나님께 불의를 하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욕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입을 다문는 것이 옳은지를 모르겠다면, 사랑하는 것은 일단 옳습니다. 
사랑하니 혼을 내줄 수도 있고, 사랑하니 이해해 줄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짖밟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혼내줘야 할 지 모르겠다면, 그 답을 기다리면서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혹시 압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실 그 답이 바로 "사랑하라"일지도요. 
사랑은 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에 먹는 따뜻한 물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해답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 답을 기다리는 동안에 목을 축여주고, 몸을 녹여주며 그래서 더 기다릴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니까요.
 
 
주일 예배 후(4월 17일) 엘토토 지체들이 카지아도 마사이 마을에 갔습니다. 
저는 내일 따로 합류할 예정이고요. 
며칠을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그분의 뜻인지, 
이 캠프에 몇명이 가는 것을 그분은 원하시는지, 
뒤늦게라도 제가 합류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나이로비에서 엘토토를 돌보는 것이 옳은지, 
캠프에 참가한 마사이들의 식사를 저희가 부담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지 
그분들이 알아서 하시는 것을 원하시는지,
새롭게 방문할 마사이 마을에도 학교를 시작해야 하는지 아닌지...
 
이 많은 질문들 중 단 하나에도 답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정의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이 심각하게 어두운 자이기에 그렇겠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그래서 사랑하고 있으려고 합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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